삶의 편린들, 한국의료 역사의 편린들
유승흠 KSoP 회장님
<연세의대 예방의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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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말 정년퇴임을 한 의대 교수는 전국에서 42명. 내로라하는 교수들의 퇴임 소식 사이로 특별한 퇴임식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 주인공은 연세의대 예방의학교실 유승흠 교수, 퇴임식 ‘타이틀’은 ‘내 삶의 편린들-정암 유승흠 실록 발표회’였다. 이날 퇴임식장을 찾은 손님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기념논문집이 아니라, 소박한 장정이 오히려 눈에 띄는 <유승흠 실록>이었다. ‘내 삶의 편린들’이라는, 약간은 고색창연한 제목의 의미는 책장을 넘기는 순간 단박에 이해가 됐다. 1936년 지어졌다는, 유 교수가 태어난 집의 사진을 시작으로 아버지의 자동차 운전면허증(1950), 초등학교 때 선물 받았다는, 보물 1호인 1939년 판본 성경책, 중학교 입학지원서 때문에 만들었다는 보물 2호인 생애 첫 목도장 등, 말 그대로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 혹은 의미 있는 순간에 유 교수와 함께 했던 ‘조각’ 들의 사진이 이어진다. 물론 실물로 유승흠 교수가 갖고 있는 물건들이다. 사실을 나열하는 딱딱한 글이지만 그가 직접 갖고 있다는 수많은 물건들의 사진은 이 글에 현실감과 따뜻함을 불어넣는다. 그가 말하는 몇 가지 물건들과 그에 얽힌 사연들을 들었다.
1980년, 생애 첫 비행기 1등석 여행 기념 손가방
TWA(Trans World Airlines)로고가 아직도 선명한 휴대용 손가방은 아직도 유 교수에게는 중요한 물건을 담아두곤 하는 물건이다. 1978년부터 3년간 원 없이 공부했던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 지도교수의 권유로 쿠웨이트 보건부 보건기획프로젝트 자문관 자격으로 두 달간 쿠웨이트에서 현지조사를 했던 여정에서 얻은 기념품이다.
“그 가방을 볼 때마다 거기 가서 했던 일, 얻은 것이 떠올라요. 주로 그런 물건들을 보관하죠.”
책에 실린 자료들은 갖고 있는 자료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그의 설명처럼, 책에는 그가 했던 수많은 일과 관련된 자료사진이 가득하다. 그 중 하나가 레지던트 시절 외국 의료선교사(손요한, Dr. John R. Sibley)의 권유로 참여했던 거제도 지역사회보건사업이다. 물론 1971년 11월 10일자로 거제군 연초면 보건지소장으로 발령을 받은 공문도 있다.
“뭐든지 남들보다 먼저 하는 경향이 있어요. 거제도 지역사회보건사업도 그랬는데, 그 선교사가 사업을 좀 도와달라며 1년만 ‘챌린지’하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외국인도 이런 역할을 하는데 내가 할 일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현장에서 세상을 배워야 제대로 된 예방의학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이 현장이 세계적으로 의미를 두고 있는 초기 시범 지역사회보건사업이었어요. 많은 것을 배웠죠.”
이곳에서 배운 지식은 후에 강화도 등 다른 지역에서 하는 사업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장기려 박사가 주도했던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설립 등에도 그의 지식은 방향을 제시하고 이론과 이상을 제도로 현실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6.27 애플 컴퓨터 프로그램 구입 영수증
유 교수는 1975년 보건의료계 최초로 컴퓨터 분석을 도입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주인공이기도 하다. 고교 시절 영문타자기를 시작으로 녹번동 가족계획연구원에서 컴퓨터 터미널 사용법을 배웠고, 이는 미 유학시절 학위논문 쓸 때 컴퓨터 활용으로까지 이어진다. 후배들에게도 사용법을 알려주고 사용을 장려한 결과 연세의대 예방의학교실과 보건대학원은 1970년대 중반부터 연구에 컴퓨터를 사용했다고. 이때부터 모아둔 IBM 컴퓨터 카드는 보건대학원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마련한 정년퇴임 기념 '마지막 강의'에 참석한 학생들과 지인들에게 기념품으로 나눠줬다.
“컴퓨터를 가르쳐준 후배가 배워보니 별 거 아니네, 하더라고요. 그래서 배우는 것은 쉽지만 처음 시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깨우쳐 준 적도 있죠. 그 시절에 애플 컴퓨터를 산 것도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성향 탓이었죠.”
애플 컴퓨터는 존스홉킨스에서 귀국하던 형에게 미국 휴렛패커드 회사에 근무하던 동생이 알려준 것이다.
1980년대 초에 2,000달러가 넘는 비싼 물건이었다. 그러다 청계천에 국내에서 복제한 애플 컴퓨터가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구매했다.
“그 시절에 제가 애플 컴퓨터를 썼다는 것을 못 믿는 사람들이 있으면 이 영수증을 보여주면 되죠, 하하. 이런 저런 자료들을 갖고 있는 것도 오래 전 이야기를 할 때 근거가 되니까, 강연할 때나 집필을 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4286년(1953년) 인쇄된 의료도덕
“아마 이 책은 의협도 안 갖고 있을 텐데…, 부산 피난시절 나온 거예요. 양재모 선생이 번역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담고 있죠. 원로들한테 물어도 그런 게 있었나 할 정도로 잊혀진 자료예요. 관심이 있으니까 눈에 띄더군요.”
유 교수는 남들이 버리겠다고 내놓는 폐지에서도 의미 있는 자료를 건져내곤 했다. 또 의미 있다 싶은 자료는 절대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는 유일하다 싶은 자료들도 많다. 그 중 하나가 미 군정청 후생부 시절 영문타자로 친 보건 관련 문서 원본이다.
“당시 담당자였던 주인호 선생이 그 자료를 몇 부 복사해서 돌렸어요. 그리고 원본을 제게 주셨거든요. 복사본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마 없지 않을까요.”
또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교육’을 했던 연세대학교 대학보건소장 오형석 박사에 관한 자료다. 1938년 에 록펠러재단의 재정 지원으로 설립된 일본 최초의 퍼블릭 헬스 훈련기관(공중위생원, 현 국립보건의료과학원) 1기생으로 최초이자 유일한 조선인 졸업자였던 오 박사의 행적을 증명하는 서류는 일본에 사람을 보내서 직접 찾은 것이다.
“나와 관계없는 자료도 많이 갖고 있어요. 1971년 최초 병원 센서스 자료, 세 번이나 시도됐던 병원경영학회 설립 과정에서 생긴 자료 등. 그런데 기증해도 오래 된 자료는 별로 반기지 않고, 폐기하기 전에 디지털 자료화시키지도 않으니까, 귀한 자료들이 점점 사라져요. 그저 안타깝죠.”
미국처럼 메디컬 아카이브가 생기면 기꺼이 자료들을 기증하고 싶다는 유 교수. <유승흠 실록>에 대한 기사가 일간지에 나고 나서는 종종 자료를 요청하는 부탁을 받는다. 얼마 전에는 나이 지긋한 사학과 교수도 연락을 해왔다고.
“이제 은퇴도 했으니 월급 받는 일은 더 이상 안 하고 싶어요. 전혀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고. 우선은 자료를 한번쯤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나라 보건의료계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귀한 자료들을 디지털화해서 CD로 보급하거나 인터넷에 올려서 필요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볼 수 있도록 하려고요. 이번 학기만 끝나면 시간도 좀 생길 테니까.”
유 교수는 책 한 권을 구하기 위해서 6개월을 기다리던 시절을 기억한다. 자료도 책도 없어서 공부하기 힘들었던 시절의 어려움을 후배들에게 겪게 하기 싫어서 책도 쓰고, 자료도 모았다. 특히 우리나라 보건의료제도가 만들어지고 자리를 잡은 지난 30년, 길게는 60년간을 증언하는 자료들은 보건의료역사를 연구하는 후배들에게 더 없이 요긴한 자료일 터다. 필요하다면 요청하는 자료를 전해주는 ‘사서’ 노릇도 마다않겠다는 유승흠 교수다.
[출처] 유승흠(연세의대 예방의학교실), 작성자 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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